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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위치한 회사로 내려오면서 의지할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빠르게 좋은 인연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어, 삶의 반 이상이 잘 채워졌지만, 사회와 회사라는 공간은 좋은 동료가 있어도 무언가 부족함을 항상 느껴지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은 인연이 많았다. 즐겁게 일할수 있는 여러 동료가 있었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제주에 내려온 지 5개월이 좀 넘었을 무렵, 서울 사옥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들이 세 명이나 제주에서 생활하고 싶다고 내려왔다. 제주는 채용이 힘들었기 때문에, 난 당연히 환영했고, 그들은 제주 동료가 되었다.

2~3년이 지나고 하나 둘 육지로 복귀하였으나, 그중 한 명은 남아서 계속 제주를 지켜주었다. 좋은 동료로서 나의 말을 잘 따라 주었지만, 이견이 있는 경우 치열하게 충돌하곤 했다. 서로 감정이 상할 때까지 충돌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톡으로 또 술 한잔에 풀기도 했던 것 같다. 일을 대충 맡겨도 알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서 척척해내 주고 나는 약간의 의견만 내어줘도 잘만 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20년 가까이 회사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크게 의지가 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일 말고도 철마다 친한 동료들과 함께 제주를 즐겼으며, 대부분 함께 해주었다. 믿음직한 동료였고, 어렸지만 누나 같았다. 때로는 아들의 고모였으며, 내 아내의 언니였다. 여러모로 우리가 의지를 많이 했다. 그만큼 마음씨도 고운 친구였다. 최근 한 달 전쯤 육지에서 온 친구분들과 우리 가족과 다 같이 저녁을 함께 했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이었던 즐거운 저녁 자리 였다. 다만 그 저녁이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

눈이 많이 오던 12월 말 갑작스러운 소식에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연락을 받고 부라부랴 응급실에 갔을때는 이미 고인이 되어있었으며,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정신없이 장례의 절차를 마치고, 부모님과 동생분을 모시고 고인의 집을 들렸다가 공항으로 모셔다 드리는 길에 한없이 우시는 어머님의 탄식에 난 표정의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제주에서의 남은 일들을 정리해야 한다. 고인의 짐을 정리하고 가족분들에게 잘 보내드려야하며 회사 자리도 정리해야한다. 잘 보내야한다는 생각뿐이다

작가 김초희 두번째 전시회

내 아내의 블로그를보다 보면 자주 어떤 느낌을 받게 된다… 따뜻한 햇살 같은 포근함과 그 따뜻한 공기의 아련함이랄까? 정확히 설명은 안되지만 블로그의 글을 보면 뭔가 잠시 내가 멍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어느날의 블로그 글은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기가 생기자 그림은 더욱 그리기 힘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태교삼아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했다. 아기가 잠들면 새벽에 겨우 그린 그림을 갖고 프리마켓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림은 다시 저 멀리 달아났다. 안개속에 있는 바다와 같았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꿈같은 것이었다. 신랑과 나 그리고 아기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다행히 최근 아이가 어린이집을 오후까지 다니기 시작하면서 모든것이 변했다.
아이과 떨어져 있는 여유시간동안 나는 온전한 나의 삶과 마주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솔직히 나는 살아가면서 크게 어떤 것에 간절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아내가 그림을 이렇게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좀 충격이었다.

우리의 아들이 45개월이나 살아가고 있고 몸무게가 14킬로를 넘어서며 우리랑 대화가 되는 만큼 뼈와 살이 붙고 생각이 자라는 동안 엄마가 해야 하는 것은 희생과 피로였다. 그럼에도 아내는 그 몸과 마음의 피로를 겪어내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보통 그림을 보면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정신 상태가 느껴진다고 하는데, 분명 힘듦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 오히려 아내의 글이 보여주는 따듯함에 제주의 수많은 감정들이 묻어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게 전시회를 하기로 했다. 물론 육지보다 따듯한 제주에서, 우리가 동경하는 애월에서, 언제나 밝음이 넘치는 한 초등학교의 건너편 작은 카페의 창고에서,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그림을 내걸기로 했다.

작가 김초희 두번째 전시회, 2018년11월 17일~26일, 윈드스톤갤러리, 제주도제주시 애월읍 광성로 272

내가 느낀 따듯하고 포근한 마음을 많은 사람이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5년

지금의 회사를 다닌 지 만으로 5년이 지났다.

5년 전과는 다르게 내 말을 항상 믿어주는 내 아내가 있다. 그리고 벌써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넘치게 느껴지는 아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기 전에 잠시 숙면을 취하고 있는 둘을 보고 나선다. 그 공간의 공기마저 포근하고 나도 저 안에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 행복한 잠자리를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고. 회사만 도착하면 피곤이 몰려온다.

회사에서는 (물론 그들이 실제로 나를 어찌 볼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야기를 존중해주는 나의 보스와 나의 팀 동료들이 있다. 힘든 시기에 입으로는 상황을 욕하면서도 서로 도와서 힘든 시기를 이겨내려는 팀 동료들을 보면 많이 고맙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조직의 규모가 계속 늘어나서 내 역할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회사에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 하지 못 하는 것 같아 내 보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5년 전에 내가 내려온 제주와 지금의 제주는 많이 다르다. 단적으로 교통정체가 생겼다. 그래도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소가 있어서 지루 할 틈은 없다. 특히 제주는 매주 색이 변한다. 봄만 하더래도, 유채꽃이 노랗게 깔리다가, 바로 벚꽃이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좀 아래서는 동백꽃이 힘차게 버틴다. 그럼 바로 수국이 포인트로 깔리며 온 세상이 푸르게 변한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여가를 보내던 안경 뚱땡이가 이 정도까지 변할 수 있게 해 준 공간을 싫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공간보다는 아내의 역할이 크지만…

얼마나 이 제주에서, 이 회사에서 더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가끔 서울에 가면 여러 지인들이 이제는 올라올 때가 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난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 회사일도 할만하고 제주가 지겹지 않다. 무엇보다 내 가족이 제주라는 공간에서 행복해한다.

다음글은 40이다 -_-

윤표 처럼

작년에 의도치 않게 프로젝트에 투입되어서 10년여만에 구축 프로젝트를 투입했다. 많은 이슈도 있었고, 힘들기도 많이 했는데 그거랑 상관없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 프로젝트에서는 특히 카카오의 어시스턴트로 근무했던 대학생 분들과 함께 업무를 진행했는데, 젊은 피 들의 즐거움은 부러웠고, 나 또한 재미 있었다

프로젝트 종료 회식을 하는데 소주를 한병씩 나누어 주었는데 거기에 레이블이 붙어있기를 “윤표처럼” 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밑에는 “회의실? 째려보다가 눈마주치면 웃어, 그게 방법이야” 라고 써있었다. 예전에 우리가 예약한 회의실에 누가 있으면 우리가 써야한다고 말하는 방법을 이야기 했나본데 그게 인상 깊었나보다.

고마웠다. 이제는 서로 각자의 길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어떤 곳이던 항상 즐겁게 생활했으면 좋겠다.

윤표처럼 - 회의실? 쨰려보다가 눈마주치면 웃어, 그게 방법이야

 

나의 2017

블로그

우선 2017년 한 해는 무조건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이 블로그를 운영을 시작한것이 2006년 부터 였는데, 11년간 277개의 글을 썼다. 한해에 평균 25개 정도 쓴것이 되는데…(그마저도 2016년에는 12개 2015년은 4개였다…) 올해는 39개의 글을 쓰게 되었다. 주제도 웹 표준 보다는 다양한 주제로 쓰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방문자수가 좀 늘어나는 것 같아 다행이다.(그래야 얼마 안되지만)

내년에는 좀 더 많이 글을 쓰고자 한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일상을 어딘가에 남겨 두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향에 도움이 될것을 믿기 때문이다.

직장

내가 속한 조직의 목표가 변경되었다. 더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와 판단으로 누군가 결정하여 내려주었다. 큰 결정을 과감하게 바로 실행하는 능력에 감탄이 나올뿐이다. 다만 멀리나는 새는 멀리 보고 크게 보지만 숲을 구성하는 하나 하나의 구성물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 알지 못한다. 2017년에는 멀리 크게 보는 사람에게 디테일을 잘 설명하지 못한 책임이 큰 한해였다. 디테일을 잘 전달 하는 것도 내가  쉽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난 능력 상 멀리 크게 보다는 내 주변의 가까운 것만 챙기는 것도 벅차다. 2018년에는 내가 모시는 팀의 구성원들이 좀 더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참이다.

가족

내 아내의 헌신으로 인해 정우가 잘 자라주고 있다. 육아를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더 잘할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내가 느낄 정도로 육아에 ‘도움이 되는 수준’ 정도로 언제나 머물러있다. 이 부분이 가장 안타깝다.

그래도 자신의 꿈을 쫓아 열심히 그림을 그린 우리 “작가 김초희”에게 너무 고맙다. KPI달성은 물론 초과 목표까지 수행했으니 약속대로 괌 여행을 가야하는데… 내가 가능한 시기가 되었을때 꼭 갔으면 좋겠다. 집안일이나 육아가 자신의 꿈을 내려놓게 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될텐데…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

홍정우는 대화라는 것을 일부 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는 “아빠 재워줘”했더니 내 볼을 쓰다 듬으며 “아빠! 자장자장”을 우렁차게 외치고 가는 정도가 되었다. 누군가의 폭풍 성장을 바로 옆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디서도 얻을수없는 큰 경험이다. 빨리 어린이 집을 가고 잘 적응을 해서 내 아내가 육아에서 조금은 부담을 덜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매년 그래왔지만 열심히 살았고, 새로 다가오는 새해도 열심히 살것같다. 다만 이제는 좀 앞날에 대한 대비를 하면서 살아야되는데, 아직 그부분에 있어서는 확신이 없다. 그래도 10년전 서른이 되었을때와 비교해서 모든것이 성장하고 안정되어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새해 인사는 이렇게 한다.

“내가 알았던, 알고있는, 알게될 모든 사람이 행복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중에 제가 제일 행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