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Life story

뜸했다.

오랜만에 글을 쓴다. 이 제목을 선택할때는 언제나 뭔가 민망하다.

오랜만에 글을 쓴다. 이 제목을 선택할 때는 언제나 뭔가 민망하다.

2018년의 회고나 2019년의 다짐 등을 쓸 여유도 없이 회사의 바쁘고 힘들고 어려운 업무를 수행하느라 잠시의 여유도 생기지 않았다. 마음에는 계속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죄책감만 생기고 부담은 쌓여갔다. 지금이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하면 무언가를 포기할 것 같아 글을 써본다.

맥북의 단축키를 한영 전환, 스팟라이트 검색 단축키를 기본값으로 바꿨다. 맥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15년 만의 변화다. 집에 맥 장비가 늘어날 때마다 계속 마이그레이션을 통해서 키보드 설정을 유지한 채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마이그레이션이 안 되는 장비(아이패드 프로+키보드, 새로운 맥북 프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적응하느라 며칠은 고생할 것 같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들이 집의 맥북프로를 밟아서 액정이 나갔다. 덕분에 맥북프로를 한대 더 업어오게 되었다. 기존의 맥북은 데스크탑처럼 쓸 생각이다. MACOS 장비는 이제 집에만 네대다…

아들은 이제 유치원을 다닌다. 어느새 훌쩍 커서 우리와 감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말도 많아졌다.(잔머리도 늘었다.) 키와 생각이 자라는 만큼 내 아내의 고생도 자랐을 것이다. 그런 힘듬을 부여잡고 화가의 삶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을 보면 참 멋있다.

추나라는 자세교정을 시작했다. 총체적 난국이라는데 좀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자세도 항상 신경 쓰려한다.

김초희 전시회 기념 상품(캘린더, 엽서) 판매글

아내는 우연히도 두번 모두 전시회를 11월에 하게 되었는데생각해보면 우리의 결혼도 11월이다전시회를 준비 하면서 몇 가지의 상품을 준비하는데 11월이라 아무래도 처음 선택하는 물건은 달력이 된다. 그래서 이번에도 달력을 판매하게 되었다.달력케이스

이번에는 탁상달력을 준비했다. 사실 벽걸이 달력으로 제작하려 했으나 제작 단가가 소량의 경우 너무 비싸서 우리같은 영세한 사람들은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탁상 달력을 준비했는데 케이스, 스티커, 달력, 받침대, 달력용지까지 쉽게 처리되는 일은 아니었다. 비용도 더 많이 들었다(차라리 그냥 벽걸이로 할 걸 그랬다) 그래도 다행히 우리가 기대했던것보다 좋은 퀄리티로 나와 다행이었다.

달력 정면도

달력의 그림은 이번에 전시하는 그림을 출력의 형태로 제작했다. 각 월마다 그 계절을 표현 할 수 있는 그림을 넣어 두었다. 달력의 모양

달력의 받침대는 원목나무로 만들어진 받침대를 제공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현무암 모양의 받침대를 생각 했었지만 여러 사정이 있어 원목 받침대를 고르게 되었다.
나무 받침대

달력의 크기는 w: 23cm*h: 10cm이고, 13장(표지까지) 모두 받침대에 꽂아두고 사용하는 방식이다.

또한 엽서를 준비했는데. 엽서 역시 이번에 전시회에 선보이는 그림으로 엽서를 제작했다.
엽서의 외관 모양

엽서는 총 9종을 묶어서 판매할예정이다.엽서 9종의 모습

달력의 금액은 22,000원이고 엽서는 10,000원으로 정했다.. 택배가 필요한 경우 4천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직접 배달도 가능하지만 이것은 나와일정을 협의해야 한다.

구매는 본 블로그의 댓글로도 신청이 가능하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댓글로도 가능하다. 아님 지인의 경우 카카오톡이나 문자로도 신청이 가능하다. 또한 별도의 신청페이지를 만들어 두었다. 많은 구매 좀….

작가 김초희 두번째 전시회

내 아내의 블로그를보다 보면 자주 어떤 느낌을 받게 된다… 따뜻한 햇살 같은 포근함과 그 따뜻한 공기의 아련함이랄까? 정확히 설명은 안되지만 블로그의 글을 보면 뭔가 잠시 내가 멍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어느날의 블로그 글은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기가 생기자 그림은 더욱 그리기 힘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태교삼아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했다. 아기가 잠들면 새벽에 겨우 그린 그림을 갖고 프리마켓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림은 다시 저 멀리 달아났다. 안개속에 있는 바다와 같았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꿈같은 것이었다. 신랑과 나 그리고 아기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다행히 최근 아이가 어린이집을 오후까지 다니기 시작하면서 모든것이 변했다.
아이과 떨어져 있는 여유시간동안 나는 온전한 나의 삶과 마주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솔직히 나는 살아가면서 크게 어떤 것에 간절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아내가 그림을 이렇게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좀 충격이었다.

우리의 아들이 45개월이나 살아가고 있고 몸무게가 14킬로를 넘어서며 우리랑 대화가 되는 만큼 뼈와 살이 붙고 생각이 자라는 동안 엄마가 해야 하는 것은 희생과 피로였다. 그럼에도 아내는 그 몸과 마음의 피로를 겪어내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보통 그림을 보면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정신 상태가 느껴진다고 하는데, 분명 힘듦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 오히려 아내의 글이 보여주는 따듯함에 제주의 수많은 감정들이 묻어있었다.

그런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게 전시회를 하기로 했다. 물론 육지보다 따듯한 제주에서, 우리가 동경하는 애월에서, 언제나 밝음이 넘치는 한 초등학교의 건너편 작은 카페의 창고에서,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그림을 내걸기로 했다.

작가 김초희 두번째 전시회, 2018년11월 17일~26일, 윈드스톤갤러리, 제주도제주시 애월읍 광성로 272

내가 느낀 따듯하고 포근한 마음을 많은 사람이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2018년 9월 1일의 아들일기

이날은 토요일이었고 아내의 언니(처형)가 서울로 이사를 간 기념으로 아들을 두고 처형네 집으로 서울 구경을 가는 날이었다.
 
아들은 가끔 엄마를 보고 싶다고는 했지만 매우 신나게 놀았다. 낮부터 너무 놀아 낮잠을 자고 저녁도 집에서 잘 먹었다
 
그리고 집 앞 마트에 걸어가서 잘 놀고 간식 등을 사들고 걸어오는 길이었다.
 
아직 만 3세가 되지 않은 아이가 걷기에는 힘든길 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빠 손을 잡고 걷다가 가끔 멈춰서 나를 올려다보고 내 손을 보곤 했다. 내 한 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과 어깨는 짐들이 걸려있었다. 아들은 뭔가를 바라는 듯했으나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나를 훑어보기를 반복… 그래서 아들에게 물었다.
 
아빠 : “아들 걷는 거 힘들어? 아빠가 안아줄까?”
아들 : “힘드어 힘드어”
 
울먹하는 아들을 번쩍 안아서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빠: “아빠가 짐이 많아서 안아달라고 못했어?”
아들: “네…”
아빠: “그래도 꾹 참고 집 근처까지 잘 왔으니까 여기부터는 아빠가 안아줄게~ 집에 가서 간식 맛있게 먹을까?”
아들: “네!!!”
 
항상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 가능성을 본 것 같아서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어느새 이렇게 쑥 자랐을까 싶었고…
 
여기까지는 약간 짠하고 좋았는데… 간식인 과자를 온 거실에 흩날리면서 먹은 건 함정이다…

덧붙이는이야기

아내는 서울에 가서 두 가지를 느꼈나 보다 그 두 가지만 이야기했다.
아내: “강남에 갔는데 물감이 너무 많아!!! 흰색이 여러 종류야!!”
아내: “지하철 버스 너무 복잡해 서울에서 못살겠어!!!
남편: “응 걱정 하지마돈 없어서 어차피 서울에 못살아…”

기억난 어느 술집

넥슨에서 근무 하고 있을때 였다. 어느때와 같이 월매네 주막(선릉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컨셉의 주막 이었다.)에 모였고 안내 받은 별실에서 팀의 형들과 고추장 찌개와 모듬전을  두고 놀고 있었다.  그 별실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무리가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 다른 무리가 술을 먹게 되면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우리가 좀 많이 시끄러웠는지 다른 무리의 한 사람이 시끄럽다고 이야기 했다. “저기 좀 조용히 해주시면 안되나요? 여기 노의원님도 계시는데… 그러지 말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건 어떠신가요?”

청년들을 만나서 자신의 정치 신념을 이야기하고 반대로 이야기를 듣는 자리 였던 것 같은데…  우리는 좀 짜증이 났다. 그러지말고 같이 이야기 하자니, 그리고 우리가 톤을 낮출 수는 있어도 조곤 조곤 이야기를 하는 술집은 아니었다. 그럴꺼면 스터디 까페를 가셨어야지.  노의원이라면 서민 정치의 상징 같은 사람인데… 술집 그리고 주막에서 소란 스럽다고 뭐라 할리가 없을텐데.. (우리가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분명히 걸그룹 가지고 그랬을꺼야..), 우리는 놀던 기분이 상해서 그냥 좀 끄적이다가 나왔다. 물론 다른곳에 가서 또 신나게 놀긴 했지만

나에게 그분은 그런 이미지였다. 서민을 위하지만 권위의식이 없지는 않은?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당시의 그 분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주변이 호들갑이었던 것 같다. (뭐라하기도 애매 했을 것 같다.) 뭐 그렇다해서 그 시절 그 술집으로 돌아간다해도 갑자기 우리가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말 이쁘게 하던 그 옆의 청년 때문에)

그래도 싫어하는 정치인에 속하지는 않았었고 좋아하는 정치인의 측에 속했던 사람이었는데,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 날 대화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막걸리라도 한잔 드리고 응원합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나의 소심함이 부끄럽다. 나도 서민이고 서민을 위해 일했던 몇 안되는 정치인 이었는데 말이다.

봉하마을에 조만간 가야겠다.